Community

이용후기

스타베팅 이용후기

작성자
스타
작성일
2023-10-30 23:32
조회
48
삶을 빼앗겼던 남자에게 여자가 물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세상이 널 이용하고 잡아먹었는데.

남자는 여자에 품에 안긴 채 대답했다.


―그래서 널 만났잖아.

진심이었다.

너에게 구원받기 위해 떨어진 나락이라고 생각하면 그마저도 다행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내가 너를 구할 차례라고.

남자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는 다섯 번의 멸망을 딛고 재앙과 맞섰다.

세상을 희게 불태우던 새벽을 부수고 하늘의 사자를 기어이 죽였다.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다.

하지만 아마네세르의 죽음 뒤에 있던 보상은 드디어 지켜 낸 연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멸망과 차가운 진실이었다.

남자는 그토록 진실했던 대가로 알게 되었다.

새벽의 용에게 멸망을 청한 것이 성녀라 불리던 그 여자라는 걸.

그래서 남자는 이어진 멸망에 대항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여자의 바람대로 녹아내리는 세상을 지켜보며 아득히 절망하는 것뿐이었다.

.
.
.

이건 그 남자의 기억을 이어받은 시온을 미치게 하던 마지막 비밀.

삼키지도 뱉지도 못해 무덤까지 끌고 가야 하는 그의 종말 같은 치부였다.


“이젠 이비를 미워하지 않는 거야?”

그런데 하얀 용이 담담한 목소리로 시온의 장막을 들춰 그가 간신히 덮어 둔 것을 도로 끄집어냈다. 그래서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다.


“계속 원망했잖아, 네가 아니라 멸망을 택한 이비를.”

아주 잠깐만이라도 잊고 싶은 사실을, 그 지독한 비정을.

그 용의 말에 왜곡은 없었다.

그래서 시온은 새벽의 근원인 유비아를 바라보며 자신의 기억에 가득한 멸망을 떠올렸다.

아마네세르. 죄 없이 타락했던 위대한 새벽은 머지않은 미래에 스스로 광기를 떨친다.

살해당한 용도 부활하는 마당에 미친 용이 정신을 차린 것쯤은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찬란함을 회복한 그는 몸을 일으키며 자신을 속박하던 저주마저 깨부순다.

이제 할 일은 하늘의 일부를 죽인 인간들에게 마땅한 심판을 내리는 것.

하지만 그 신성한 존재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듯 철퇴보다 저울을 먼저 들었다.

어쩌면 변명의 여지 없이 더 확실히 짓밟아 죽여 버리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세상의 죄를 증언할 자를 지정하여 자신의 저울에 달았다.

그때 선택된 것이 이비 아리아테.

이 추악한 세상을 향해 기꺼이 멸망을 선고할 인간의 성녀였다.


“너는 이제 이비를 미워하지 않아?”

유비아의 천진한 물음에 시온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침잠이 표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지만, 유비아는 개의치 않고 되물었다.


“마음이 풀렸어? 아니면 그냥 덮은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미 포기한 거야?”

시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심오한 존재는 침묵을 헤아려서 그의 대답을 대신 꺼내 놓았다.


“셋 다구나.”

정곡이 찔린 시온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유비아가 그 불쌍한 남자를 동정하듯 속삭였다.


“넌 정말 상냥하고 쉬운 인간이야.”

유비아는 여느 때처럼 단조로운 목소리로 시온의 가장 아픈 구석을 들쑤셨다. 가장 진저리나는 약점을 공격했다.

그래서 시온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머저리인지 재차 확인당한 채 유비아를 바라보았다.

모든 행동을 유예하고 서 있던 그가 비로소 걸음을 뗐을 때, 그의 얼굴은 이제껏 보여 준 적 없는 냉혹함으로 얼어 있었다.

시온은 그토록 스산한 얼굴로 아직 앉아 있는 유비아의 앞에 섰다.

그러곤 인내심을 잃은 손으로, 놈의 통통한 볼을 양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이거 아파.”

대뜸 볼을 꼬집힌 유비아가 침착하게 호소했다. 그래서 시온도 똑같이 침착하게 끄덕여 주었다.


“다행이네, 평범하게 아프다니.”

“다행 아니야, 폭력은 좋지 않아으아앙!”

시온이 더 본격적으로 뺨을 늘리자 차분하게 항의하던 유비아가 결국 비명을 질렀다.

시온은 용이 울부짖는 소리를 한동안 감상하다가 손끝의 힘을 잠시 풀었다.

간신히 틈이 생기자 유비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항의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여태 어리다고 봐줬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보다 훨씬 연상이잖아, 너.”

“용은 나이 안 먹으아아!”

용과 싸우는 게 본업이고 애들을 다루는 게 부업인 백작 겸 선생은 또 한 번 능숙하게 이 밉살맞은 것을 다시 응징했다.

유비아는 탄생 이래 경험한 적 없는 수모에 또 한 번 절규하다가, 간신히 시온의 손을 떨치고 소파에 엎어졌다.

시온은 그 모습을 보며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손을 털었다.

안 그래도 묘하게 정곡을 찌르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남의 속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었다니, 이걸 안 이상 놈의 도발과 농락을 봐줄 이유가 하등 없다.

게다가 안 먹어도 되는 밥을 달라며 꼭두새벽부터 깨워 댄 것도 혹독하게 탄압당해 마땅한 일이었다.

시온이 이런저런 원한을 단번에 풀고 후련해하는 사이, 유비아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발개진 얼굴을 잡고 시무룩하게 중얼댔다.


“정곡을 찔렸다고 폭력을 쓰는 건 나쁜 짓이야.”

“그래서 보통은 입조심이라는 걸 하지, 나쁜 짓 당하기 전에.”

모처럼 인간의 상식을 알려 줬건만, 용은 배울 마음이 없는지 더 시무룩해졌다.


 
그래서 시온은 다시 혀를 찼다.

쉬운 인간이니 뭐니 하며 사람을 헤집어 댄 것도 짜증 나지만, 그보다 찝찝했다. 노체가 이쪽 사정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그래서 시온은 장난은 이쯤하고 한층 차가워진 태도로 유비아를 추궁했다.


“이비한텐 왜 접근한 거야?”

“너는 비가 내리면 그 비가 널 따라왔다고 생각해?”

“다 우연이라고?”

“아니, 일부러 접근한 거 맞아.”

“그럼 말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이비는 나를 세상과 연결해 줬어. 그래서 나도 이비가 바라는 걸 들어주러 온 거야.”

시온이 낮게 윽박지르자 유비아가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성의 있는 대답을 듣고도 시온의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괜히 집적대지 마. 더는 너희한테 놀아날 생각 없으니까.”

시온은 오히려 매몰차게 경고했고, 그에 유비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네가 준비한 결말이 어긋날까 봐?”

또 정곡이다.


“너는 너를 가둔 결말이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것도 마찬가지.

한낱 인간은 용과 언쟁해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시온은 하는 수 없이 진득한 원망을 쏟아 냈다.


“그래, 너희가 이비를 선택해서 이렇게 된 거니까 더는 참견해서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틀려, 우린 선택하지 않았어.”

그러나 유비아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로 시온의 원망마저 부정했다.


“이비가 스스로 자격을 갖춘 거야. 우리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우리에게 목소리를 전한 것도 이비였어. 아멜은 이비의 선택을 인정한 것뿐이야.”

이번에도 그 용의 말은 굽은 면도 틀린 점도 없이 정확했다.

어둠을 거니는 용은 그토록 맞는 말만 하며, 어린잎을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걸 알면서 이비를 미워하지 못하는 건 너야.”

시온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심장에 칼이 꽂힌 심정으로 시선을 떨어트리자, 유비아가 자그맣게 덧붙였다.


“쉬운 인간.”

반복된 모욕에 시온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눈을 치켜뜬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유비아를 본 순간 멈칫하고 굳어 버렸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넌 쉬운 인간이야.”

소년의 형상을 한 용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웃었다.

태고부터 이어져 온 존재답게 깊은 눈으로 주시하며 자애롭게 속삭였다.


“나는 너의 그런 면을 정말 좋아해.”

예상치 못한 미소에 얼어 있던 시온은 유비아가 덧붙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의 치부를 들추고 실컷 소금을 뿌려 댄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시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비아를 노려봤다.

그럼에도 시온을 향한 유비아의 미소는 여전했다.

마치 앙상한 뼈를 비로소 가득 채운 달처럼, 다만 충만하고 온화했다.

.
.
.

용을 상대할 땐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진이 다 빠진 시온은 이 한 가지 결론을 마음에 새기며 복도로 나왔다.

하지만 뒤늦게 다짐해 본들, 놈이 던진 돌멩이들은 최근에야 겨우 잠잠해진 시온의 심경에 파문을 일으키다 못해 풍랑과 해일을 짓고 있었다.


―이제 이비를 미워하지 않아?

유비아의 순진하고도 의뭉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떠올라 귓전에 울렸다.


―마음이 풀렸어? 아니면 그냥 덮은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미 포기한 거야?

―셋 다구나.

유비아의 말을 곱씹던 시온은 한숨만 길게 토했다.

정말 모조리 간파당했다. 저걸 과연 살려 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쉬운 인간인 걸 계속 증명하는 것 같아 짜증 나지만, 유비아의 통찰은 정확했다.

유비아의 말처럼 시온은 이비를 원망했다.

하지만 유비아의 말처럼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유비아의 말처럼 셋 다였다.

젠장.

시온은 낱낱이 까발려진 기분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바다가 달에 이끌리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시온의 전신인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면서도 여자를 미워하지 않았다. 돌아서거나 버리지도 못했다.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면서, 멸망을 바라는 여자 하나를 배제하지 못해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기억을 받을 당시의 시온은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아직 소년이던 시온은 그 남자의 미련함과 비굴함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남자를 대신해서 그 여자를 미워하기로 했었다.

굳이 멸망을 택한 그 여자의 음습한 성미를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누구보다 빛나던 주제에, 다른 이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양 발판을 깨트린 그 여자의 냉혹함을 절대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냉정하게 선을 그으려 했지만, 사실 시온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더 괴로워하는지.

그 남자가 새벽을 죽여 사랑을 증명한 것처럼, 그 여자도 일관된 선택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다.

반복된 멸망은 그 여자가 남자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시온은 다른 무엇보다 이 사실이 야속했다. 그리고 거기에 무너지는 자신이 비참했다.

그래서 더 이상 머저리가 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건만, 결국 이 모양이다. 용에게마저 쉬운 인간이라고 인정받았다. 참 일관되게도.

자신의 멍청함에 환멸이 밀려왔지만 이미 너무 익숙해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치를 모르는 양 연인을 스타베팅 헤맸다.

그는 덧없이 헤맨 끝에 비로소 이비를 발견했다.

이비는 햇살이 가득한 방의 퇴창에 몸을 기댄 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갸름한 선을 그리는 뺨이 언뜻 보였다. 그 너머로 비스듬히 드러난 속눈썹이, 코끝이, 그리고 입술의 모양이 다만 거짓말 같아 시온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 너를 계속 미워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